언론보도
[문화일보] “악기만 잡으면 장애도 아픔도 없는 세상으로 ‘비바체’”
- 작성일2017/12/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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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만 잡으면 장애도 아픔도 없는 세상으로 ‘비바체’”
장애인 오케스트라, 뷰티플 마인드 뮤직 아카데미 앙상블
“쉿, 템포에 집중.” 지휘자는 단호했다. 흩어졌던 단원들 눈에 초점이 잡힌다. 여기저기 ‘끼익’거리던 악기음과 ‘웅성웅성’하던 소음이 한순간 멈췄다. 연습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에 휩싸였다. “자세 바르게 하고. 하나, 둘, 셋.” 바통(지휘봉)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따∼라따, 따라 따∼.”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가 강렬하게 흘렀다.
멈춤과 쫓김, 이어짐과 미끄러짐이 반복되는 선율. ‘놀라운’이란 형용사 외에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16명의 장애인은 눈을 감고 스스로 만들어 내는 음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한 발, 두 발 세상을 향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연, 현성, 인석, 동한, 선우, 가은이…. 뷰티플 마인드 뮤직 아카데미 앙상블 단원은 전원 장애인이다. 9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에 자폐 증상의 발달장애인 13명과 시각장애인 2명, 복합장애인 1명이 모였다.
뷰티플 마인드 앙상블은 명칭처럼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플루트, 클라리넷 등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오케스트라다. 말은 어눌하고, 대화가 맞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연주 실력은 아마추어를 뛰어넘는다. 처음에 이들이 오케스트라 화음을 끌어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5년 가을, 기적은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시작됐다. 이화여대 관현악과 배일환(47) 교환교수는 스탠퍼드대 교정을 걷고 있었다. 그는 서울 온누리 사랑 챔버가 이곳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온누리 사랑 챔버는 정신 지체장애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국에서 온누리 사랑 챔버의 선율이 울려 퍼지면 장애인 본인들은 물론 많은 교포에게도 희망이 되리라 생각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스탠퍼드대 한인학생회(KSAS)와 음악 동아리 ‘뮤직 포올’이 발 벗고 나섰다. 서울의 미국 영사는 설명을 듣고 두말없이 단원들의 비자를 발급해 줬다. 스탠퍼드대도 기꺼이 장소를 제공했다.
2006년 2월 스탠퍼드대 딘켈스피엘 대강당. 온누리 사랑 챔버, 배 교수의 제자인 이화12첼로,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양이 콘서트를 가졌다. 객석을 메운 관객들은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피아노 소리에 숨을 멈췄다. 공연이 끝나자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배 교수는 “오늘의 콘서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뷰티플 마인드’ 비영리 재단을 설립해 미국과 한국 장애인들에게 음악을 지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음반 판매 수익금을 전액 불우이웃 돕기에 썼던 소마 트리오의 멤버이기도 하다. 전공은 첼로. 줄리어드와 예일대 음대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뷰티플 마인드는 그해 3월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출범했다. 음대 출신 교포 학생을 중심으로 지금도 현지에서 국적과 상관없이 장애인들에게 음악을 선물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2007년 3월 사단법인 단체로 문을 열었다. 홍콩에서도 정식 음악 자선 단체로 등록을 했다. 서울의 뷰티플 마인드는 지금까지 베트남, 일본, 러시아, 방글라데시, 몽골, 폴란드 등 전 세계를 돌면서 공연했다. 그때마다 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객석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장애인들이 일궈 낸 감동의 음악 외교 활동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음악적 성장 가능성에 의문이 들기도 했지요. 단원들과 소통이 어렵고, 기초가 있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우리 앙상블 단원들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단원들은 순수 그 자체입니다. 함께 연주를 하면 제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입니다.”
음악 재능 나눔에 나선 이용주(43) 경원대 겸임교수는 격주 토요일 충무아트홀에서 열리는 앙상블 연습 시간이 즐겁다. 아내도 앙상블에서 지휘자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서울대 작곡과 동기 동창 이원숙씨가 그의 아내다. 김정원(23)·수진(22) 자매는 비올라와 첼로를 가르친다. 임다운(20)씨는 클라리넷 관악 부문을 맡았다.
연습실 한편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음이 울렸다.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춘다. 발달장애 자폐 증상이 있는 배성연(16)군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연주에 몰입했다. 이 교수는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으로 대성할 소질이 있다”고 말했다. 배군은 바흐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외울 정도로 암기력이 뛰어나다. 어머니 강선옥(51)씨는 “성연이가 뷰티플 마인드에서 연습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며 “선생님들의 지도가 음악적 감성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뷰티플 마인드는 무료 음악 교실도 열고 있다. 행복반(지적장애) 14명, 사랑반(신체 감각장애) 7명, 희망반(7명) 학생들에게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1대 1로 음악 레슨을 해 주고 있다. 선생님들에게 교통비가 지급되지만 다시 기부로 이어지고 있다. 중구청도 취지에 동참해 충무아트홀을 연습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배 교수는 뷰티플 마인드 첫 공연 무대 당시 한 어머니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안고 산다고 했다. “사회에서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음악을 통해 내 아들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보니, 나의 모든 상처는 이제 치유됐습니다.”
이제교기자 jk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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